민족의 혼이 서린 백용성스님 탄생지 장수 죽림정사(현대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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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0-02-20 조회6,535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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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죽림정사는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이며 만해 한용운스님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참가한 백용성스님의 탄생지에 불심 도문스님이 세운 절이다.
백용성스님 생가터가 복원되어 있고 그 바로 옆에 죽림정사가 세워져 있으며 교육관과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 대웅보전. 상단에는 다른 협시불이 없이 석가모니불만 조성되어 있다.
▲백용성스님의 유품이 잘 정리되어 전시되고 있다.
▲ 독립유공자 훈장증서와 오래된 풍금도 전시되고 있다.
스님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1990년 은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 사랑채와 장독대. 일반 보통사람들이 살았음직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 스님들이 거주하는 승당건물.
뒤쪽으로 동화댐이 보인다.
용성스님
1864년 5월 8일~1940년 2월 20일.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백상규(白相奎)이며 용성은 법호이다. 법명은 진종(震鍾).
전라북도 장수 출생으로, 16세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불문에 입문했다. 해인사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한용운과 함께 불교계 대표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참가했다.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들 것을 제안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징역 1년6개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감옥에서 한글 성경을 가지고 있던 목사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921년 한국 불교 사상 처음으로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했다. 1928년 '조선글 화엄경'을 펴냈다. 당시의 언론은 '세종대왕도 못했던 일'이라고 하였다. 윤봉길 의사에게 임시정부로 가서 항일운동을 할 것을 권유하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일제가 사회 문화 전반에 왜색을 도입하면서 불교에서도 대처승을 인정하는 정책을 펴자 자신이 세운 대각사(大覺寺)를 중심으로 왜색불교 추방 운동에 앞장섰다. 1924년 잡지 《불일(佛日)》을 박한영과 함께 창간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과 육식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건백서를 두 차례 제출했다.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사원 경제의 자립을 위해 1929년 경상남도 함양에 자급형 농장인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고 선농불교(禪農佛敎) 운동을 펼쳤으며, 여기서 나온 수익금을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보내기도 했다. 《화엄경》 등 경전의 한글화 작업과 일요 어린이 법회 개설, 거리 포교 및 찬불가 도입 등으로 불교 대중화와 포교 방법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양복을 입고 금광도 개발하는 등 절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크게 힘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1990년 은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