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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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구제와 일본 민족정신 말살정책에 맞서기 위해 불교의 대중화에 나서다.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우리민족을 일제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곧 중생구제이고, 이를 위해서는 불교의 대중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고 인식한 용성조사는 48세가 되던 1911년 산속 사찰에서 참선수행해 오던 산사생활을 끝내고 속세에 뛰어들어 서울 종로 봉익동에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고 대각교운동(大覺敎運動)을 전개 하게된다. 대각교 운동이란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自覺覺他)”는 정신을 바탕으로 그간 서민들의 삶과 동 떨어진 산중불교 중심에서 사회변화에 발 맞추어 중생과 함께하는 대중불교로 전환하고, 개항이후 일본 불교의 침투로 왜색화 되고, 천시받던 불교를 개혁.정화하여 호국불교(護國佛敎)로서의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 살리자는 것이다. 그후 대각운동의 본산인 대각사는 불교계 민족운동가들이 시국을 논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대중, 호국불교의 포교. 수련장이 되었으며, 일본식민지 정책중 한국불교를 왜색화를 통해 민족정신을 말살 하고자 하는 정책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이나라 민족정신과 불교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

만해 한용운대사와 함께 3.1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조사께서는 대각사가 창건되기 전 백제불교 도래지인 서울 우면산 대성초당에서 임제종 운동으로 인연을 맺고 있던 만해 한용운 대사와 국내외 정세에 관해 의논을 나누었다. 용성조사는 호법을 담당하는 대체(大體)가 되고 만해 한용운 대사는 호국을 담당하는 대용(大用)이 되었던 것이다. 이 대체와 대용이 굴러져 천도교와 기독교의 장로회, 감리회 등 민족대표들을 설득하고 독립선언문에 차례로 서명 함으로써 천도교, 기독교,불교가 하나의 얼이 되어 3.1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된 원동력이 된것이다.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옥고를 치르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태화관에서 자리를 함께하여 독립선언서를 작성 하고 서명하였다. 백용성조사는 불교 대표로서 천도교 대표 손병희. 기독교 대표 길선주 목사및 이필주 목사에 이어 네 번째로 서명하였다. 이날 용성조사는 일부러 제자 동헌스님으로 하여금 태화관 주인을 가장하고 일본순사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을 하고 있다며 민족대표들을 현장에서 체포하도록 만들었다. 이 구금 소식은 전국에 퍼졌고 3.1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소리가 전국 방방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일본경찰에 붙들린 백용성 조사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던 날“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주어 진다면 또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다”라고 말해 독립운동에의 변함없는 의지를 밝혔다. 조사께서는 서대문 구치소에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셨다.

3.1 독립만세 운동 당시 태극기 사용을 주장하다.

만해 한용운 대사가 “흰 바탕위에 푸른색의 대한반도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는 제안을 했고 천도교.기독교장로회 측에서 무방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용성조사는 “독립만세 운동에 반도기를 사용하면 발해와 고구려의 옛땅을 포기하는 선언임과 동시에 삼천리 반도 강산만 대한제국의 영역으로 한정된다”면서 “태극기 물결을 일으키자”고 역설했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자는 용성 큰스님의 주장 배경은 별도로 소개하고자 한다.

윤봉길의사를 만주에 보내다.

백용성 조사는 대각사에서 윤봉길의사에게 삼귀오계를 수계하고 만주 임시정부에 가서 항일 독립운동을 할것을 권유 하였고 윤의사가 뜻을 받아 항일 운동에 나서 므로서 홍커우 공원거사를 통해 대한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게 되었다. 용성조사 입적후 대각사를 찾은 백범 김구 선생은“용성 큰 스님께서 보내주신 독립운동 자금으로 나라의 광복을 맞이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헌 윤봉길 의사를 보내 주시어 만대에 순국의 사표가 되도록 하여 주셨습니다“ 라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조사 영전에 감사함을 표했다.

만주에 선농당, 함양 백운산에 화과원을 조성 독립자금을 지원하다.

백용성조사는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후 만주 연길 명월진과 봉영촌에 대각사 선농당(禪農堂)을 설립하고 700ha의 농장을 마련, 일제의 압박을 피해 유랑하는 동포들에게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 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고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백운산에 임야 30여ha와 많은 전답을 구입하여 화과원(華菓園)을 만들 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금과 전국 불교계 에서 모은 자금을 만주 북간도 연변 용정 대각사에 운반하여 일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일부는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가에게 전달, 항일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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