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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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화실의 향기](18) 전북 장수 죽림정사 조실 도문스님(경향신문/20071006/토/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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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0-02-27 조회2,1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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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20071006/토/종교>

 

염화실의 향기](18) 전북 장수 죽림정사 조실 도문스님

-“허상 버리면 본성이 밝아져요”-

독립운동가이자 대선사인 용성스님의 사상과 가르침을 펴는데 평생을 바쳐온 도문스님. 15년의 대불사로 용성스님 생가를 복원하고 죽림정사를 지어 9일 낙성회향법회를 갖는다. <죽림정사(장수)/이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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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원로의원이자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죽림정사 조실 도문 스님(72)을 만나러 가는 길. 들판에 가을이 가득했다. 남원에서 장수로 이어지는 국도변에는 구절초와 코스모스가 한창이고, 능선을 따라 이어진 사과밭에는 빨갛게 익은 사과가 꽃처럼 예뻤다.

지리산·백운산·덕유산이 중첩한 장수 땅. 죽림정사는 백두대간 한복판 장안산 자락 아늑한 터에 자리하고 있다. 도문 스님이 독립운동가이자 불교의 대선사였던 용성(龍城·1864~1940) 스님 생가터를 복원하고 지은 사찰이다.

일주문 오른쪽에는 용성기념관이, 그 맞은 편에는 용성교육관이 들어섰다. 경내 한 가운데 대웅전이, 대웅전 왼쪽 뒤편엔 용성 스님 생가가 복원돼 있다. 전각마다 용성 스님의 게송을 적은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죽림정사를 방문하면 누구나 기념관과 교육관에 들른 후에야 도문 스님을 만날 수 있다.

‘諸行之無常(제행지무상·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고)/萬法之俱寂(만법지구적·만법이 다 고요하도다)/匏花穿籬出(포화천리출·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閑臥麻田上(한와마전상·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웠도다)’

용성 스님 ‘열반송’을 마음에 새기며 죽림정사 조실채에 들어섰다. 노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먼저 절을 했다. 스님의 느닷없는 행동에 당황한 방문객은 엉겁결에 맞절을 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천진한 모습이었다.

마침 스님은 ‘용성 진종조사 탄생성지 죽림정사 낙성회향법회’를 앞두고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5년에 걸쳐 이루어진 죽림정사 대불사를 마무리한 스님은 조금은 들뜬 모습이었다. 죽림정사는 오는 9일 오전 11시 낙성식을 봉행한 뒤 용성 음악제를 연다. 낙성식에 앞서 8일에는 용성 스님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학술 세미나가 열린다.

“용성 스님의 사상과 가르침을 집대성한 도량을 회향하게 됐으니 감격스럽죠. 이제 큰스님의 민족 정신과 한국 불교의 지성화와 대중화, 생활화를 실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셈입니다.”

용성 스님은 3·1 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로 만해 한용운도 그의 지도를 받았다. 윤봉길 의사에게 항일운동을 권유했는가 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대각교를 주창한 사상가이자,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역경가이며, 선농일치의 참선수행을 실천해 근대 한국 불교를 중흥시킨 대선사로 평가 받고 있다.

“대각사상은 자기도 깨우치고 남도 깨우치게 만들어 깨달음으로 충만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용성조사의 핵심 사상입니다. 대각심을 내면 부처요, 자비심을 내면 보살이요, 번뇌를 내면 지옥이니, 이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도문 스님은 용성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은 법손(法孫)이다. 용성의 제자인 동헌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평생 ‘용성 조사 유훈’을 앞세우는 생활을 해왔다. 이제 사람들은 도문 스님을 만나면 곧바로 용성 스님을 떠올릴 정도다. 이날도 스님은 용성 스님의 탄생부터 출가, 정진, 오도, 독립운동, 옥고, 경전의 한글화, 찬불가 제정, 대각교 창설 등 일대기를 줄줄이 풀어놓았다.

스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열적이고 진지했다. 큰 키에 꼿꼿한 허리로 가부좌한 채 오랜 시간 자세 한번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는 젊은 사람에게도 깍듯한 존대어를 쓴다. 그러나 조실채 밖에까지 다 들릴 정도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음성이 너무 커서 미안합니다. 용성 스님은 ‘심처존불 이사불공’(心處存佛 理事佛供, 마음 가는 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그 일과 이치에 불공하라)이라고 가르쳤어요. 질문에 대해 성의를 다하는 것도 불공 아닙니까. 하하하.”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라는 말일 것이다. 용성 스님은 열반 직전 맏상좌인 동헌 스님에게 유훈 10가지를 남겼다. 가야·고구려·백제·신라 등 우리나라 불교 전래지의 성역화, 100만권의 경전 번역과 배포, 100만명에게 계를 주라는 것 등이 대표적인 유훈이다.

도문 스님은 1961년부터 그 말씀을 실천하는 일에 나섰다. 47년에 걸친 스님의 원력으로 용성 스님의 유훈은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가야의 불교 전래지인 경남 창원 봉림산 봉림선당지, 백제 불교 전래지인 서울 서초구 우면산 대성사, 신라 불교 전래지인 경북 구미 도개면 아도모례원 등을 성역화했다.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원, 성도지인 보드가야 보리수원, 최초 설법지인 바라나시 녹야원 등 불교 5대 성지를 가꾸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특히 네팔 룸비니의 국제사원구역에는 97년부터 대규모 한국식 사찰인 대성 석가사를 건립 중이다. 그 동안 불경과 조사어록을 100만권 이상 배포하고, 100만명에게 수계했다.

용성 스님과 도문 스님은 숙세의 인연으로 맺어졌다. 그의 증조부는 용성 스님 후원자이자 도반이었다. 부친은 용성 스님의 유발상좌로 독립운동을 했다. 도문 스님의 출가는 증조부와 용성 스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용성 스님은 열반 직전 6살짜리 도문 스님을 만나러 왔다.

“용성 스님은 내가 12살 되면 출가시켜 동헌 스님을 은사로, 만암 스님을 계사로 가르침을 받으라고 했다는 겁니다. 나는 순전히 어른들의 뜻에 따라 스님이 됐어요. 태어나기도 전에 내 길은 정해져 있었던 겁니다.”

도문 스님은 “나는 용성 스님의 심부름꾼일 뿐”이라며 항상 스스로의 공부를 숨긴다. 그러나 젊은 시절 한 번 문을 잠그고 좌복에 앉으면 며칠이고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수행 정진했다. 얼굴에 버짐자국이 뚜렷이 남은 것도 나무 아래에서 오랫동안 좌선을 하다가 자외선에 피부가 상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1946년 백양사로 출가하자마자 만암 스님으로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화두를 받았다. 도문 스님은 1주일을 꼼짝 않고 앉아 화두를 참구했다. 스님은 “모든 법은 하나로 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느냐”는 스승의 물음에 말없이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만암 스님은 그의 깨달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만암 스님이 12살짜리 소년에게 깨달음을 인가했다는 소문이 전국 사찰에 퍼졌다.

소식을 듣고 오대산의 한암 스님이 그를 찾았다. 1949년 한암 스님은 그에게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화두를 주면서 1년 뒤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소년은 오대산이 불바다가 돼 스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한암 스님은 “식(識)이 맑으면 그런 게 보일 수도 있다”고 넘어갔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일어나 한암 스님은 상원사를 지키다가 열반했다. 한암 스님은 열반 전 피난을 떠나는 제자 탄허 스님에게 도문 스님을 찾아보라는 뜻을 남겼다. 도문 스님은 월정사에서 6년 동안 탄허 스님을 모셨다.

“삼라만상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몸뚱이는 생로병사의 허상, 물든 마음(염심)은 한생각 나오고 잠시 이어지고 달라지고 없어지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허상, 세계와 우주조차도 이루어지고 존속이 되고 무너지고 공이 되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허상입니다. 그런데 나의 본성은 생사도, 생멸도, 성괴도 아닌 불가사의한 실체, 형상이 없는 주인공, 그 놈이란 말입니다. 허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그 본성이 밝아집니다.”

스님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 창을 하듯 게송을 읊기 시작했다. 이렇게 게송을 노래로 부르는 것은 용성 문중의 가풍이라고 한다.

“모든 악을 짓지 말아라.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그 마음을 청정히 하여 깨달아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치심이니라.”

도문 스님은 “앞으로 2010년까지 대강 일을 마무리지은 다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고요히 수행할 것”이라며 “내가 해보니 너무 힘들어서 제자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맡길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제일’이란 집착을 버리세요. 마음을 쉴 줄 알면 고요함을 알게 됩니다. 고요함이 극에 이르면 ‘나’란 놈이 밝아지지요.”

도문 스님이 쩌렁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모나고 둥글고, 길고 짧은 것을 말해봐. 주인공아. 너는 누구냐!” ‘무진장’(무주·진안·장수의 오지를 일컫던 말)의 첩첩산에 설핏 단풍이 내리고 있었다.

?▲ 도문스님은?

1935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46년 동헌 스님을 은사로, 만암 스님을 계사로 출가했다. 60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경주 분황사, 공주 마곡사, 장성 백양사, 정읍 내장사, 서울 대각사 주지와 조계종 감찰원 감찰국장, 총무원 교무부장, 중앙종회의원 등을 지냈다. ‘불교인의 365일’ 등 여러 권의 책을 냈다. 현재 장수 죽림정사, 경주 천룡사 조실이며, 대각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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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종 선임기자〉

 

[염화실의 향기]제자들이 말하는 도문스님
입력: 2007년 10월 05일 14:55:43
-“오직 용성조사 가르침대로 수행”-

복원된 용성스님 생가 앞에 선 도문스님과 제자 환희(오른쪽)·일초스님.
1969년 경주 분황사. 부처님을 참배하고 바삐 법당을 나서는 고등학생을 주지 도문 스님이 불러세웠다. “학생은 어디서 오는 길인가?” “학교에서요.” “학교에서 오기 전에는?” “집에서요.” “집에 오기 전에는?” “…” “그럼 이제는 어디로 갈 건가?” “집에요.” “집에 갔다가는?” “학교에 가야지요.” “그 다음에는?”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다음에는 죽겠죠.” “죽은 다음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놈아. 어디서 온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얼 그렇게 서두르는고?” 학생은 다음날로 출가했다. 지금의 ‘정토회’ 지도법사이자 최근 죽림정사 주지로 취임한 법륜 스님 이야기다.

도문 스님 문하에는 쟁쟁한 제자들이 많다. 스님은 특히 청소년 학생 군포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서 불제자를 찾아내 출가시켰다.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인 보광 스님 역시 분황사 주지 시절 고등학생을 불문에 맞아들였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학담 스님은 서울대 불교학생회에서 활동하다가 지도법사였던 은사의 뜻에 따라 출가했다. 그는 1980년대 불교의 사회참여를 불교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최초의 책 ‘앎의 해방, 삶의 해방’을 펴냈다. 90년 이후 각운동(覺運動)의 이름으로 선의 대중화와 선과 사회적 실천을 하나로 묶는 운동을 펴고 있다. 이밖에도 전 해인사 율원장 혜능 스님, 네팔 룸비니에서 11년째 대성석가사 불사를 계속하고 있는 법신 스님, 전통범패 이수자 법안 스님 등이 도문 스님의 제자들이다.

“용성조사께서 가르치신 불법에 대한 원칙과 민족성이 분명하신 분입니다. 오직 용성조사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전부입니다. 새벽 2시부터 예불에 지극정성이고 목적 없이 밖에 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죽림정사에서 만난 제자 환희 스님(천룡사 주지)과 일초 스님(죽림정사)은 “원칙대로 제자와 신도를 이끌면서도 걸림없이 무애한 분”이라며 “아침에 용성조사님 이야기를 시작해 점심을 넘을 때까지 계속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제자들에게 엄한 스승인 도문 스님은 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강조한다. 어디서든 주인 의식을 가지고 전력을 다하라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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