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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민족대표 백용성 조사 장안산 출생(새전북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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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0-02-21 조회1,3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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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민족대표 백용성 조사 장안산 출생
▶호남정맥과 함께한 역사
기사 게재일 : 2009-07-1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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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용성 조사(祖師·1864~1940))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나 불교계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큰 스님이었으며 일제시대에는 3·1독립운동의 막후기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였다.

 백용성 조사는 1864년 호남정맥의 종산인 장안산 남쪽자락인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14세 되던 해 남원의 교룡산성 덕밀암에 출가하였으나 부모의 극구만류로 귀가하였다가 16세에 다시 출가해 해인사에서 불문에 입문했다. 그 후 전국과 중국의 사찰을 돌며 수행하였고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불교계 대표로 활약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은 모두 종교인으로 구성돼 있다. 천도교 인사 16명, 기독교 인사 15명, 불교계 인사가 2명이다. 반외세의 기조 아래 서학(西學·기독교)에 대립하여 민족 고유의 종교임을 내세우는 천도교계와 기독교계가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용성 조사는 이런 적대적인 두 종교 간의 관계를 조정하여 대연합전선을 구축, 독립선언서가 탄생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

 3·1운동과 관련된 흥미 있는 일화가 있다. 서울 종로의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중 29명이 참석하여 한용운 스님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각 종교를 대표한 인사들이 독립선언서만 낭독하고 그대로 흩어지면 독립만세운동이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백용성 조사가 기생을 시켜 대표들의 신발과 두루마기를 숨겨놓으라 했고 태현 승려를 시켜 일본 헌병대와 종로경찰서에 신고토록 한 것이다. 이리하여 29명의 각 종교를 대표한 민족대표가 체포 연행됐고, 삼천리 강산 2000만 동포가 한 물결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3·1 만세운동은 이후 중국의 5·4청년운동, 인도의 독립운동 등 아시아의 비폭력 자주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백 조사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일제가 사회전반에 왜색을 도입하면서 대처승을 인정하는 등 영향이 미치자 서울 종로에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고 불교개혁과 민족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대각사에서는 `화엄경’ 등 30여 종의 경전을 번역하여 한글화 하였으며 이는 우리말과 글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시기 항일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특히 조사는 직접 노동을 하여 사원경제를 자립하는 선농불교(禪農佛敎)운동을 펼쳤으며 여기에서 나온 수익금을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다.죽림리에는 백용성 조사 탄생성지가 있고, 경내에는 목조로 지은 생가, 용성교육관, 대웅보전, 용성기념관 등이 있다.   유달리 <호남정맥 공동탐사단>

    <광주전남녹색연합·전북녹색연합·광주드림·새전북신문 2년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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