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신문> 장수의 인물 백용성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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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23-05-29 조회2,472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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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승려 백용성
백용성조사 탄생성지 죽림정사 장수군 번암면 죽림2길 31
백용성 조사 생가에 걸려있는 백용성 조사의 모습.
백용성 조사 탄생성지 죽림정사는 독립운동가 백용성 조사의 호국(護國), 호법(護法) 정신을 기리기 위한 국가 현충시설이자 가람(승려들이 한 장소에서 불도를 수행하는 장소)이다.
백용성(白龍城, 1864. 5. 8∼1940. 2. 24)선생은 1864년 5월 8일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백남현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수원(水原), 속명(俗名)은 상규(相奎), 법명(法名)은 진종(震鍾), 법호(法號)는 용성(龍城)이다. 7세 때인 1870년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시작하고 9세에 이르러서는 한시를 지을 정도로 영특했다고 한다. 선생은 14세 때 출가하려 하였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 1879년 16세에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극락암으로 출가했다. 해인사는 고려시대 불력(佛力)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아보려 조판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수한 호국사찰 가운데 하나인 곳이다.
해인사로 출가한 이후 40세 남짓까지 전국의 명승 대찰(大刹)을 두루 찾아다니며 수행에 정진하면서 불법을 깨우쳤다. 44세 때인 1907년 9월 중국으로 건너가 약 2년 동안의 여행을 통해 선생은 국제 정세와 시대의 변천을 직접 체험하게 되고 그 경험은 이후 대각교(大覺敎)운동의 도움이 되었다.
용성조사는 48세가 되던 1911년 참선수행하던 산사생활을 끝내고 속세에 뛰어들어 서울 종로 봉익동에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고 대각교운동(大覺敎運動)을 전개한다.
대각교운동이란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自覺覺他)'는 정신을 바탕으로 그간 서민들의 삶과 동떨어진 산중불교 중심에서 사회변화에 발맞추어 중생과 함께하는 대중불교로 전환하고, 개항 이후 일본 불교의 침투로 왜색화되고, 천시받던 불교를 개혁·정화하여 호국불교(護國佛敎)로서의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 후 대각운동의 본산인 대각사는 불교계 민족 운동가들이 시국을 논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대중 호국불교의 포교 수련장이 되었으며, 일본식민지 정책 중 한국불교를 왜색화를 통해 민족정신을 말살하고자 하는 정책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이 나라 민족정신과 불교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
◆3.1운동 민족대표로
조사는 대각사가 창건되기 전 백제불교 도래지인 서울 우면산 대성초당에서 만해 한용운 대사와 국내외 정세에 관해 의논하며, 천도교와 기독교의 장로회, 감리회 등 민족대표를 설득하고 독립선언문에 차례로 서명함으로써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하나의 얼이 되어 3.1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됐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태화관에서 자리를 함께하여 독립선언서를 작성, 서명하였다. 백용성 조사는 불교 대표로서 천도교 대표 손병희. 기독교 대표 길선주 목사 및 이필주 목사에 이어 네 번째로 서명하였다.
후에 법정에서 일본인 판사에게 "조선이 독립하는 것이 마음으로 좋아서 찬성하였다"라고 말하기도 하는 등 조금도 조국 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음으로써 호국불교의 신념을 표출하였다. 백용성 조사는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또한 백용성 조사는 윤봉길 의사에게 불교를 알려주고 항일 운동에 나서게 했고, 홍커우 공원거사를 통해 대한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게 되었다.
백용성 조사는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후 만주 연길 명월진과 봉영촌에 대각사 선농당(禪農堂)을 설립하고 700ha의 농장을 마련, 일제의 압박을 피해 유랑하는 동포들에게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주며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다.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백운산에 임야 30여ha와 많은 전답을 구입해 화과원(華菓園)을 만들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했다. 전국 불교계에서 모은 자금을 만주 북간도 연변 용정 대각사에 운반하여 일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일부는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가에게 전달, 항일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었다.
◆불경의 한글화 작업
수감 중에도 선생은 늘 불교의 대중화를 고민했고 그를 통해 어떻게 중생구제와 민족 독립의 역량쌓기를 고심했다. 선생이 얻은 결론은 불경의 한글화 작업이었다.
"오동나무 잎사귀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천하가 가을됨을 아는 것이니, 세계 인류는 생존 경쟁을 하고, 경제의 파탄은 극도로 되어 가는 시대에 누가 한문에 뇌를 썩히어 수십 년의 세월을 허송하며 공부하리오. 비롯 수십 년을 공부할지라도 한문을 다 알고 죽는 자는 없을 것이며, 다 통달한다고 할지라도 장래에는 무용의 학문이 될 것이니 무엇에 쓰리오. 오늘날 철학, 과학, 천문학, 정치학, 경제학 등 배울 것이 많은 시대에 한문만을 가지고 수십 년의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문명발달의 장애만 될 것이며, 설사 수십 년 동안 한문 공부를 하여서 큰 문장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 종교의 진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또 중국 사람들은 중국 글을 좋아하나 우리 조선 사람들은 조선 글이 적당할 것이니 내가 만일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서 경전 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 연구의 한 나침반을 지으리라."
어려운 한문으로 된 불경을 쉬운 한글로 번역해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함으로써 불교의 대중화를 확대하고, 나아가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우수성과 호국불교의 전통을 발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독립역량을 증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1921년 3월 출옥 후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불경의 한글화 작업과 불교 대중화를 위한 각종 포교서의 저술에 착수하게 됐다.
◆산중불교가 아닌 현실불교로
이 시기 일제는 일선(日鮮) 동화 정책과 민족문화말살책의 일환으로 한국불교에 대한 왜색화 작업을 가속화시켰다. 일제는 승려들이 아내를 두고 술과 고기를 먹는 것들을 암암리에 조장했고, 주지 자격에 남자승려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전통을 파괴하고 있었다. 이에 백 조사는 뜻을 같이 하는 비구승들과 함께 1926년 5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여 조선총독부의 불교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불교계의 정화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전통을 사수하는 노력을 했다.
이와 같이 백 조사는 일제 강점기 민족의 문제와 종교의 문제가 같다고 인식했다. 조국과 민족에서 동떨어진 산중(山中) 불교가 아닌 아픔을 같이 하는 현실 불교를 추구한 것. 결국 백조사는 그 실마리를 대중불교와 호국불교의 전통을 지닌 한국 불교에서 찾았고 대각교를 개창하여 한국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 고수하며, 민족 문제의 해결을 모색한 민족 문화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렇게 일생을 보낸 선생은 1940년 2월 24일 목욕재계한 뒤, 제자들을 불러 놓고 "그동안 수고했다. 나는 간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입적했고, 이때 나이는 77세였다.
죽림정사에는 한반도 모양의 연못으로 피안교가 설치되어있고, 담장 아래 설치된 태극기 조형물이 보여 3·1독립정신을 느낄 수 있다. 백용성 조사 영정을 모셔놓은 생가와 부처님을 주불로 하고 다섯 탱화를 모셔놓은 대웅보전, 우리 민족 사관과 불교 사관을 정립하는 용성교육관, 용성조사의 탄생에서 입적까지 행적과 유품이 전시되어있는 용성기념관 등이 있다.
백용성조사 탄생성지 죽림정사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2길 31
☎063)353-0109
E. [email protected]
고재영 기자 [email protected]
출처 : 장수신문(http://www.jangsu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