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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와 발원,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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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0-02-24 조회6,6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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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 계를 지키지 못했다면 파계한 이유와 원인을 살펴보고 다음에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노라고 부처님에게 다짐하는 것이 참회이다. 더럽혀진 밥그릇과 국그릇 따위를 씻는 것처럼 하루 또는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이 지은 여러 가지 잘못을 스스로 드러내어 뉘우치는 것이다.

참회의 방법은 어렵지 않다. 마음의 그릇인 몸을 깨끗이 하는 것도 일종의 참회이다. 하지만 온갖 마음의 상처와 오물로 얼룩진 마음자리를 깨끗이 하는 것이 진정한 참회라고 할 수 있다. 분노, 자존심, 두려움, 질투, 아만등으로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준 일은 없는지 되돌아보는 것, 나에 대한 집착 때문에 미워하고 원망했던 사실은 없는지, 살펴보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참회의 방법이자 내용이다.

이러한 참회는 곧 마음 비우기라고도 할 수 있다. 낮 동안에 누구에겐가 화를 냈으면 화를 낸 데 대해 참회함으로써 화라는 마음의 찌꺼기를 비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비워진 그릇 속에 필요한 내용물을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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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원이 있는 사람한테는 천만 원이 행복이다. 신용불량자에게는 채무청산이 행복이다. 그리하여 백만 원 있는 사람이 천만 원을 벌기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그는 천만 원을 벌 때까지 불행하다. 자신이 움켜쥐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고 놓지 못하는 것이 불행의 과정이며 그로인해 자신과 주변이 힘들어지는 것이 불행의 드러남이다.

참회와 비움의 행위를 통해 발원이 일어날 수 있다. 참회의 바탕 위에서 일어나는 발원이 아니면 자칫 욕망이 되기 쉽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발원이라는 형식은 항상 그런 위험이 따른다. 참회 없는 발원은 김치 그릇에 생수를 담는 격이다. 그 차이를 자각하지 못하면 욕망을 발원으로 착각하면서 정진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다.


발원과 욕망을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의 끝을 잘 살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발원의 끝에는 ‘나’가 없다. 그러나 욕망의 끝에는 반드시 ‘나’가 있다. 이를테면, 자녀의 입학을 기도할 때 그 궁극이 ‘좋은 대학입학’이라면 진정한 발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그 순수성을 의심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자녀가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많은 친구들을 제쳐야 한다. 게다가 그 속에는 ‘나의 자녀’라는 의식이 있다. ‘나의 자녀’라는 의식 속에는 물론 나의 체면, 자존심, 명예, 허세 등의 마음이 숨어 있지 않을 수 없다. ‘나’라는 아상, 내 자식이라는 아만심이 자리잡고 있는 한 그것은 발원의 가면을 쓴 욕망의 모습이기 십상이다.

반면에 기도의 궁극이 ‘내 자녀로 인한 세상의 밝음’이라면 어떨까. 이 자녀가 훌륭하게 커서 모든 아상을 죽이고 세상의 어려움만을 생각하면서 보리심을 생활화하는 재력가나 사회사업가로 크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면,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명실공히 ‘발원’이라고 할 것이다. ‘내 자식’이라는 생각보다 ‘세상의 것’이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에게는 내 자녀라는 마음이 별로 없다. 자신은 애를 낳고 길러주는 역할을 했을 뿐 본질적으로 ‘온 우주가 낳아서 기르는 자식’ 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발원과 욕망의 차이이다. 그것은 물론 아무도 알 수 없는 마음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마음의 과보는 한치 어긋남 없이 엄연하다. 이러한 참회와 발원도 일정한 형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부처님에 대한 예경이다. 예경은 물론 몸의 자세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 바탕에는 마음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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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예경의 첫 번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절은 교만하기 쉬운 자신의 마음을 항복받는 것이며 자신의 참나를 향한 공경의 자세이기도 하다. 불상에게 절을 하는 것은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공경이며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상 그 자체에 삿된 의미를 부여하여 어떤 불상은 재물 공덕이 크고 어떤 불상은 공부 공덕이 크다는 식의 사고는 불법을 저급한 기복 신앙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절은 보통 3배가 기본이다. 이는 삼보 즉, 부처님(불)과 진리(법)와 승가(승)에 귀의한다는 의미이다. 108배나 그 이상의 절을 하여도 그 내용은 삼보에 대한 예경이다. 물론 절하는 숫자가 많아지면서 그 대상 또한 부처님에서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으로 구체화돼 갈 수는 있을 것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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