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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특별관 ?] 기미년 3월1일,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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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4-04-16 조회10,9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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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올해는 용성조사(1864-1940)께서 탄생하신 지 150년이 되는 해입니다. 조사님께서 태어나 활동하던 당시 우리 민족과 불교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대처 식육이 만연하는 등 전통 조선불교의 정체성은 위기에 빠졌고, 우리 민족은 일제의 침탈로 절망 속에 신음했습니다.
 
조사님은 이렇듯 피폐해진 불교와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속으로 뛰어들어 바른길로 이끄셨습니다. 흐트러진 불법을 바로 세우고 수탈당하던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조사님의 행적은 결국 중생의 아픔을 보듬어 안고 구제하겠다는 굳건한 원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정토회에서는 용성조사님의 위대한 삶과 업적을 재조명하고자 홈페이지에 용성특별관을 새로이 개설하였습니다.

3월부터 매주 한 번 이 자리에 조사님의 알려지지 않은 혹은 잊혀진 삶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암담하고 척박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앞길을 환히 밝히는 횃불을 들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신 선각자 용성조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오늘날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 시대의 과제를 풀어갈 지혜를 배웠으면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

 
기미년 3월 1일,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
<용성조사와 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을 고대하며 일찍부터 종로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5천여 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가슴을 후려치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민족대표들이 인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삼창 직후 일본 순사들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민중은 술렁였다. 일제의 압제와 착취를 더 이상 인고하지 않겠다는 묵직한 저항과 자주독립에의 뜨거운 염원들이 동시에 솟구쳐 나왔다. 그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극도로 당황한 일본의 경찰과 군대가 잔인하게 진압했지만, 분연히 일어선 사람들의 함성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자발적이고 거족적인 비폭력 민족운동으로 역사에 길이 남은 이 기미년 3·1만세운동을 위해 용성조사는 청년승려들에 대한 지도부터 민족 대표들의 조직과 결집, 독립선언서의 완성과 배포에 이르기까지 전체 준비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도 공을 드러내거나 내세우지 않는 무아의 실천으로  기꺼이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이미 승단의 거목이면서 대중의 존경과 지지도 높았던 그는 독립선언서에 불교계 대표로 서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3.1운동의 막후기둥 역할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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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선언식 직전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과 용성 조사.

조사께서는 전민족의 공분을 이끌어내고 운동의 지속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독립선언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셨다. 이에 시자 태현(훗날의 동헌스님)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식 직전 대표들의 두루마기와 신발을 감추게 하고 태화관 주인을 가장해 헌병대와 종로경찰서에 신고하게 하였다. 그 결과 민족대표는 모두 체포, 수감되었으나 그 파장으로 삼천리 강산에 거대한 만세운동이 물결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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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용성 조사.


용성조사는 재판 때마다 꼿꼿한 기개로 독립운동에 대한 견고한 의지를 천명하여 오히려 일본 검사와 판사를 주눅들게 하였다. 변호사를 대지 말고, 사식을 취하지 말고, 보석을 요구하지 말자는 자신의 옥중투쟁 원칙을 지킴은 물론 나머지 민족대표들에게도 독려하면서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독립의 신념을 관철시키고자 항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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